보여지는 것에 대한 갈구

- 백원선의 작품세계

오광수(미술평론가, 뮤지엄 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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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첫 개인전으로부터 따지면 백원선의 화력은 20년을 상회한다. 이 기간 동안 개인전을 포함해서 각종 국내외 아트페어와 그룹 초대를 합치면 50회에 가까운 전시 기록을 보이고 있다. 이 기록은 그의 활동의 내면을 가늠하는 척도이기에 충분하다. 작가란 모름지기 작업-창작-을 하는 사람이며 그것은 그의 삶의 존재 이유를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백원선의 창작활동은 작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거듭 확인해온 치열한 역정(歷程)을 대변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작업을 거의 하지 않는 작가-엄격히 말한다면 이는 작가라 할 수 없겠지만-도 적지 않고, 작업을 중도에서 포기한 작가의 수도 헤아리기 힘들다. 그만큼 이 땅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우리 미술계의 현실적 단면을 떠올려본다면 그의 역정은 더욱 당당하게 보인다. 자기 일에 대한 확신과 이를 밀고 나가는 놀라운 끈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의 내용도 어떤 일관된 맥락을 유지해 보이면서 더욱 자신 속으로 침잠하는 동력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점으로 보면, 작가가 작품을 만든다기보다 작품이 작품을 만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는 꾸준함 속에 작품이 창조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품이 작품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작품과 작가는 부단히 서로를 밀어내는 상황에 빠지게 되며 부조화로 인한 방치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불행한 현상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작품이 작품으로 이어지는 창작의 순환이야말로 건강한 창조의 근간이다.

20년에 이르는 백원선의 작품을 일별해볼 때 꾸준함의 모색이란 수사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일정한 맥락을 지니면서도 시대별로 변화를 시도하려는 의지가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이는 일탈일 수도 있고 도약일 수도 있다. 일탈은 맥락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도약은 그것이 일정한 맥락을 지닐 때 성숙의 단계라 부를 수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현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성숙을 통한 비약이 되지 않을 때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좌절과 침체는 이의 결과이다. 도약은 자신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강한 자신감을 안겨준다는 데 더욱 의의가 있다. 백원선의 창작의 맥락에서 발견되는 것은 강한 자신감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자신감이야말로 그의 전체 작품을 이끌어온 참다운 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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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선의 1회 개인전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매체에 있어 서양화와 방법에 있어 시대적인 미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출발이 당시 서양화가 직면하고 있었던 보편적인 상황에 의하고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데뷔기의 작품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소는 다름 아닌 내면으로부터의 울림을 지니고 있었음이다. 이는 자신의 독자한 세계에 대한 확신을 말해준다. 이 확신은 매체를 달리하는 이후의 경향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화면상에 나타나는 여러 요소는 96년 이후와는 외면상 확실히 다르다. 무엇보다도 유채안료와 수묵을 기조로 하는 질료의 차이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시대적 미의식보다 자신 속으로 침잠하는 변화의 기운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매체에 있어 한지와 모필에 의한 수묵이 중심을 이루면서 혼합매체로 이어지는 보다 열린 조형의식은 개별적인 방법의 모색의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1회 개인전에서의 작품과 2회 개인전 이후의 작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공통된 요소는 표현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울림의 또다른 표현으로서). 서양화 매체로 다루어졌던 작품에 나타나는 응집과 분출의 표현적 기운이 이후의 수묵매체의 내면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는 하나의 호흡 말이다.

96년 개인전의 서문에서 유준상은 “94년의 발표회는 그리는 주체의 직재적인 행위의 흔적을 보여주는 ‘보는 것’인데 비해 이번 발표회에선 ‘보이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유해볼 수 있다. 그것은 보는 주체의 시각인지의 구조적 내용이 아니라 회화 그 자체를 구성하는 물리적 구조로부터 회화의 구조를 검증한다는 입장이다.”고 언술한 바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쉽게 풀어본다면,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고 보이는 것은 보는 측과 보여지는 측의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시각인지에 다름 아니다. 보는 것은 이쪽에서 저쪽을 보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은 이쪽에서 저쪽을 보는 것이자 동시에 저쪽에서 이쪽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보는 것은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반면 보이는 것은 이차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는 것은 일반적 시각의 작용이지만 보이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성립되는 시각적 조건인 셈이다. 그러기에 누구에는 보이지만 누구에게는 보이지 않게도 되는 것이다.

96년 이후의 작품상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이전의 표현적인 기류에서 구조적인 기류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복합적인 요소들이 개입되는 가운데서도 사각 종이상자의 등장은 의외로움을 던져준다. 그리고 종이상자는 간헐적이지만 가장 꾸준하게 반복,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구조적인 것이라기보다 어느 절대한 것에의 동경의 반영이 아닌가 보인다. 절대한 것에로 향하는 갈구의 표상으로서 말이다. 그가 말레비치, 몬드리안, 요하네스 이텐, 엘즈워스 켈리와 같은 절대한 형태에의 추구에 깊은 감명을 받았노라는 언급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96년 이후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균형과 공존이라는 표현에 상응되는 요소가 지배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사각의 종이상자와 같은 구조의 요소와 분방한 운필의 자유로움이 한 화면에 교차함으로써 화면은 깊이와 동시에 넓이로서의 균형을 획득해 보인다. 한편에선 종이사각의 형태가 나열되는가 하면 한편에선 흘리고 뿌리는 수묵의 드리핑이 시도된다. 이는 박영택이 언급한 바의 “그리기와 만들기, 모필의 체험과 수작업의 공존”이기도 하다. 그리기는 일련의 수묵드로잉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수작업은 종이상자의 등장으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린다는 것은 그것이 수묵에 의한 만큼 다분히 자동적이며 만들기는 구조적이면서도 동시에 입체적이다. 평면의 수묵드로잉과 종이상자의 입체의 공존은 자칫 불협화음을 일으킬 내면적 조건을 지니면서도 의외롭게 공존과 균형을 모색해 보이고 있다. 백원선의 독자한 방법의 모색은 이를 통해 극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평자들이 그의 작품을 두고 대립적인 요인들-예컨대 음과 양, 안과 밖,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상대적이지만 상호보완으로 인해 완성의 조건에 달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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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의 자동적 기술(記述)과 한지의 질료적 정서의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전개양상이다. 이는 한지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의 발견으로 이어졌다는 데서 한결 의의를 더해주고 있다. “나의 작품은 옛 여인들의 자수와 복식, 규방문화에서 추상된다. 규방문화를 접하고 보면 인위적이지 않은 소박함과 단아함, 그 순수한 조형성을 현대회화에 접목하여”로 이어지는 근원에의 탐색은 그의 조형을 한결 풍부한 내면의 성숙으로 이어간다. 한지가 단순한 소지(지지체支持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지가 지닌 정서의 발견에서야말로 우리의 내밀한 정서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한지에 대한 물성의 발견과 그것의 조형적 원용은 한국미술이 거둔 하나의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원선에 있어 한지는 우리 고유의 규방문화와 결합됨으로써 독자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그의 한지의 조형적 실험은 한지의 물성이 지닌 “묘한 깊이감과 은은한 비침의 미학”으로 성숙한 단계를 보인다. 그것은 “가림과 노출, 채움과 비움의 조화”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경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선(禪)>, <멈춤>, <카르마Karma>의 연작에서 보이는 이미지의 보다 구체적인 구현은 가림과 노출의 현상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보인다. 기법적으론 가림과 노출이 콜라주와 데콜라주(Decollage)로 이어지면서 극명한 대립과 공존의 더욱 풍요로운 완성을 지향한다. 오려 붙이기와 다시 부분적으로 떼어내기를 반복함으로써 한지의 물성이 지닌 부드러움과 거침이 이미지의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전체 작품을 통해 볼 때 <멈춤>과 같은 극적 이미지의 표출은 퍽 예외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지의 부드러움과 거친 질료, 그리고 붙이고 떼어내는 수작업을 통하지 않고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것은 그려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려지지 않은 미묘한 간극의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같은 상황을 “떨림”이라고 말한다. 떨림은 미세한 운율의 억제에서 오는 미묘한 파장을 일컬음이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겹쳐진 한지 흔적들은 옛 여인들의 속옷과 속살이 다 비치는 모시께끼 적삼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다분히 체험적인 것이고 나아가 옛날로 이어지는 한국여인들의 섬섬(纖纖)한 내면의 정서로 이어지는 한 선험적인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그가 한지를 소재로 다루는 작가들과 다른 그 독자의 세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절제된 내면의 세계”에 감응하는 “미세한 떨림”의 세계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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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에 빈번히 나타나는 대립하는 또 하나의 개념으로서 반복과 증식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채움과 비움의 또 다른 상황인지도 모른다.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원형과 사각형이다. 원형과 사각은 반복과 증식의 논리 속에 생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비되면서도 반복과 증식의 논리에서는 항상 일치된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주의 생성논리의 그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천상과 지상은 대립하면서도 그것의 조화와 균형이 없이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은 마치 떠가는 달을 연상시킨다. 원 속에 떠오르는 수묵의 흔적들은 달 속으로 흘러드는 구름의 띠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원의 형은 어디서나 발견되지만 유독 한국인에게 있어 원은 밝은 보름달로 원용된다. 둥근 보름달이 천상을 대변한다면 지상은 사각의 형태로 대변된다. 사각의 종이상자가 밭에서 연유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빌리면 지상을 대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밭이다. 이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원과 사각, 즉 천상과 지상은 그가 설정한 모든 대립에 우선한다. 모든 대립하는 개념은 이 속에 함몰된다. 하나의 작은 씨앗 가운데도 우주가 있듯이 그의 작품은 단순한 작품으로서의 존재이기에 앞서 우주의 생성논리와 질서를 찾아가는 하나의 작은 드라마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이로써 보여지는 것에 대한 갈구가 하나의 드라마로 탄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